리뷰

영화 <미나리>

Han-Park 2021. 4. 25. 12:04

나는 지난 3월에 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적 있다. 내 정신 상태가 건강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의사 선생님은 차분한 태도로 나와 함께 나의 상태를 단어와 문장들로 펼쳐 놓고 바라봐 주셨다. 상담에 대한 선생님의 소견은 '성장통' 이었다.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등 주변인과의 관계들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맺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 성장통을 잘 지켜보라고 하셨다. <미나리>는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성장통을 다룬다.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 가족 이야기이다. 이민자는 태어난 국가의 사람에도, 살고 있는 국가의 사람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가진다. 영화에서 다루는 정체성의 소수자성 때문일까, 영화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단순히 나이와 성별에 따라 평면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관객이 '저 또래 남자아이들은 원래 그래.' 또는 '와이프 또 바가지 긁는다' 라고 여기고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가지고 있는 꿈과 책임감, 좌절, 불안과 같은 감정을 클로즈업하고, 인물의 상황-감정-행동을 맥락 속에서 담아 보여준다. 영화는 마이크로-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시점을 바꾸며 가족 구성원 모두를 개별적인 주인공으로 만든다. 빠른 스토리 전개를 위해 성격 유형이 고정해놓은 드라마들과는 달랐다.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시청자에게 인물을 찬찬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출처: Imdb

여기서 놀라웠던 점은 촬영이다. 카메라는 자세를 높였다 낮추며 어른의 눈높이와 어린이의 눈높이를 번갈아 잡는다. 이런 촬영 기법은 어린이를 '가족'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극 속 장치가 아닌, 하나의 성숙한 주체로서의 등장인물로 인정한다. 또 벽을 활용한 촬영도 재미있었다. 영화를 보면 화면 구성에서 벽의 비중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공간과 공동체에 대한 인지를 관객의 무의식 속에 새겨넣는 방법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가족이 살고 있는 황량한 시골에 덩그러니 놓여진 이동식 집은 인물들이 낯설고 외로운 상황에 있음을 말한다.

 

아칸소라는, 백인 위주의 시골 동네에서 동양인인 이 가족이 경험하는 인종 차별을 세련된 방식으로 그려낸다. 영화 <겟 아웃>이 흑인과 백인 사이에 그어진 선을 노골적이고 명확히 드러냈다면, <미나리>는 차별을 '미성숙한 방식으로 외지인을 맞이하는 것' 이라고 정의한다. 앤이 교회에서 사귄 '어린' 여자아이가 앤과 친해지려고 하는 놀이나, 대니엘이 친구 집에서 만난 친구 어머니의 남자친구(어린 아이한테 '나 어젯밤에 집에 있었다고 말해줘' 라고 거짓말할 것을 부탁하는)가 대니엘에게 건네는 충고로 성숙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차별을 그려낸다. 

 

출처: Imdb

언어도, 얼굴 모양도 다르지만 문화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일이면 십자가를 끌고 다니는 의식을 치르는 '십자가 아저씨', 농장 고용인 폴의 엑소시즘과 아내 모니카가 믿고 있던 한국의 샤머니즘(무당 등)이 결합하는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서는 남편 제이콥이 부정하던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는 행위를 모니카, 폴과 함께 하면서 가족 외부의 문화적인 연대가 가족의 끈끈함에도 기여할 수 있음을 말하며 내부와 외부가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Imdb

어린이를 주체적 인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할머니를 등장시켜 부부 역시 '다 큰 어른'이 아닌 '성장하는 인물'로 보여지게 한다. 할머니가 앤과 대니엘을 앉혀놓고 화투로 이겨먹으려고 하는 모습이나,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행동들에서 관객은 그녀를 지혜를 전해주는 완성형 인간으로서의 할머니가 아닌, 다른 등장인물과 같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 놓여진 한 인물로 인식하게 된다. 20-40대가 주인공인, '사회 생활'을 하는 그들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영화와는 큰 차이가 있다. 자녀-부모-조부모 3대가 서로를 가르치고 도와주는 이야기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미나리>의 이야기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닮아있다. 금전적 요인(또는 사회 제도)으로 출발한 갈등이, 가족 구성원 간의 다툼으로 퍼지고, 내면과 인간관계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모든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풀과 작물들이 싱그럽게 자라는 시골에서 전개되어 도시인들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 상태에서 등장인물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잔잔하고 빠르지 않은 영화의 흐름 속에서, 등장인물의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들을 접하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갈등을 비추어 보기도 한다.

 

<미나리>가 가지고 있는 영화적 언어가 나로 하여금 내 삶을 찬찬히 돌아보고, 내가 원하는 관계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진짜로!) 영화를 보는 내내 향긋한 미나리를 씹고 싶어졌다. 향긋한 미나리 내음이 가득해서 보는 내내 미소짓게 되는 영화였다. 추천!